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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죽은 구름, 정거장에서의 충고



죽은 구름



구름으로 가득찬 더러운 창문 밑에

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마룻바닥 위에

그의 손은 장난감처럼 뒤집혀져 있다

이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온 것처럼

비닐 백의 입구같이 입을 버린 저 죽음

감정이 없는 저 몇 가지 음식들도

마지막까지 사내의 혀를 괴롭혔을 것이다

이제는 힘과 털이 빠진 개 한 마리가 접시를 노린다

죽은 사내가 살았을 때, 나는 그를 몇 번인가 본적이 있다

그를 사람들은 미치광이라고 했다, 술과 침이 가득 묻은 저

엎어진 망토를 향해, 백동전을 던진 적도 있다

아무도 모른다, 오직 자신만이 홀로 즐겼을 생각

끝끝내 들키지 않았을 은밀한 성욕과 슬픔

어느 한때 분명 쓸모가 있었을 저 어깨의 근육

그러나 우울하고 추악한 맨발 따위는

동정심 많은 부인들을 위한 선물이었으리

어쨌든 구름들이란 매우 조심스럽게 관찰해야 한다

미치광이, 이젠 빗방울조차 두려워 않을 죽은 사내

자신감을 얻은 늙은 개는 접시를 엎지르고

마루 위엔 사람의 손을 닮은 흉측한 얼룩이 생기는 동안

두 명의 경관이 들어와 느릿느릿 대화를 나눈다

어느 고장이건 한두 개쯤 이런 빈집이 있더군,

이따위 미치광이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죽어갈까

더 이상의 흥미를 갖지 않는 늙은 개도 측은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저 홀로 없어진 구름은 

처음부터 창문의 것이 아니었으니



정거장에서의 충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가랄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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