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정보

가시나무 뗏목 / 심수자



길 위의 묵시록



현관문 유리에 낯선 물체가 부딪쳤다


갈라진 틈으로 순식간에 피어오르는 흰 길

피워 문 마리화나 연기가 저러할까

몽환의 유리문


현관 밖으로 달려 나가고 싶어

아무도 몰래 꼭꼭 숨겨놓았던 길들을

단번에 깨어버리고 날아든 물체의 근원이

궁금해졌다


밖이 안으로 기어들지 못하게아니 

아니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온몸으로 막아서던 유리의 몸이

한순간, 허망을 뻥 뚫었다고나 할까


차츰 샛바람은 불어 들고

간간 죽은 새의 깃털도 날아드는데

투명을 어떻게 버려야 투명에 이를 수 있는지


찰나에 다녀간 하나님 말씀을 나는 빗자루로 쓸어 담는다


흩어진 길의 조각들 속에서 이리저리 침묵을 살핀다


비의 안쪽에서

소리 죽여 울던 내 울음소리가

이제는 문밖까지 들릴 수도 있겠다



고장 난 벽시계




시계는 고장 났어도 시곗바늘은

보이지 않는 채찍에 쫓긴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불면은 

시침에 걸린 보름달에게

산티아고 순례의 길을 묻는다


칠흑 같은 어둠을 사랑하는 나

사랑초 몇 포기 심어놓고

세레나데라도 불러주고 싶다고

달의 상처에게 말을 거는데


난데없이 달은 내가 불쌍한지

삼지창에 찔려 퍼덕이는 물고기를

창문 앞에 던져주고 간다


입술 달싹여 나지막하게 불러보는

내 노래에

무릎 젖은 귀뚜라미처럼

멈춰있던 시곗바늘이

움찔한다



마가나무




가부좌 틀지 않아도

눈 감고 오로지

비바람과

햇볕으로

익히는 수행


툭툭 바닥으로

떨어지는 

열매는

이미

붉은 사리였다


비탈 옮겨 다니며 

피워내는 꽃으로 보아

마가나무는

내공 깊은 절대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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